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생애 (문단 편집) === 루마니아 혁명 === [[파일:external/www.konas.net/051031_2304.jpg]] 차우셰스쿠 공산독재의 종식을 외치며 시위를 벌이고 있는 루마니아 국민들의 모습. [[솔리다르노시치]] 깃발도 보인다. [[파일:루마니아의 해방.png]] 부쿠레슈티의 루마니아 공산당 중앙 위원회 앞 '궁정 광장'[* 오늘날에는 '혁명 광장'(Piața Revoluției)으로 개칭되었다.]에서 차우셰스쿠 공산독재 치하에서의 루마니아 국장을 제거한 루마니아 국기를 든 시위대. [[냉전]] 시기 [[동유럽]]에서 벌어진 자본주의화의 바람은 루마니아에도 불었는데, '''[[루마니아]]는 [[동유럽 혁명|동구권에서 연달아 공산당 정권이 붕괴하고 자본주의 체제로 바뀌는 과정]]에서, 무력을 사용하여 [[유혈사태]]가 일어난 유일한 국가이기도 하다.''' 사실 루마니아 혁명의 조짐은 그 이전부터 2차례의 대규모 노동자 봉기에서부터 보였다. 1977년 8월 1~3일에는 루마니아 정부가 광부의 장애 연금 지급을 중단하고 퇴직 연령을 50세에서 55세로 늘릴 것을 발표하자 기존부터 열악한 노동 환경에 시달리던 [[트란실바니아]] 지역의 지우 밸리(Jiu Valley)[* 한때 루마니아 최대의 탄광이라 불렸다.]의 광부들 9만 명 중 3만 5천 명이 항의의 의미로 대규모 파업을 하자 차우셰스쿠는 광부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듯했으나[* 6시간 근무, 토, 일요일 휴무, 광부들의 아내와 딸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공장을 건설하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참고로 원래 광부들은 법정으로 정해진 8시간 근무를 초과하는 장기간 노동과 저임금은 기본에 토, 일요일에도 열악한 환경에서 쉬지 않고 일해야 했고, 할당량을 달성하지 못하면 급여가 삭감되었다.] 이들 중 600명을 심문한 후 50명을 정신병원에 가두고 15명에게는 2~5년의 노동교화형을 선고했으며, '위험하다'고 판단된 300명 이상은 고향에서 쫓겨났고, 2천~4천여 명의 광부들은 해고당했다. 루마니아의 공산정권 지도자들은 1978년 1월 1일까지 지우 밸리를 출입제한 구역으로 선포하며 이 사건의 전파를 막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사건을 '공산당과 노동계급 사이의 단결의 신화를 깨뜨릴 수 있다'며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방 선거가 열리던 1987년 11월 15일에는 루마니아 최대 공업 도시 중 하나인 [[브라쇼브]]에서 트럭 공장 노동자 2만 명이 급여 삭감과 도시에서 15,000개의 일자리 제거 소식에 반발하여 밀린 임금을 요구하며 "차우셰스쿠 타도!", "공산주의 타도!" "루마니아인들이여, 일어나라!"를 외치면서 공산당 본부 건물과 시청을 약탈하면서 차우셰스쿠의 초상화와 잘 채워진 식당의 음식들[* 당시에는 진미로 여겨졌던 시비우 살라미 소시지, 치즈, 바나나, 오렌지, [[펩시]] 콜라 등이 진열되어 있었다고 한다.]을 던지고는 당 문서들과 선전물들을 도시 광장에서 불태웠는데, 시위대들은 식량난이 극심한 시기에 지방선거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축제처럼 준비된 관청 건물과 풍족한 식량에 분노했다고 한다. 해질 무렵 세쿠리타테는 도심을 포우하고 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했는데, 사망자는 없었으나 300명이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는[* 얼마나 고문이 참혹했는지 7~8일 만에 '''최소''' 12~13kg이 준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1987년까지는 정확히 61명, 1990년까지 100여 명이 최종적으로 유죄를 선고받아 6개월~3년 이내의 징역형을 선고받거나 고향에서 쫓겨났으며, 당 간부들은 고향에 남아있는 노동자들의 아내에게 추방된 남편을 만나려면 당의 승인을 받아야만 가능하게 했으며, 극단적으로는 추방된 남편과의 이혼을 '권유'하기도 했다. 여하튼 이 사건은 차우셰스쿠에 대한 노동자 계층의 불만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자 루마니아 혁명의 예고편과 다를 바 없었다고 평가받는다. 1989년 4월자로 루마니아는 외채를 전부 다 갚았지만 차우셰스쿠는 자녀들의 말도 제대로 안들으면서 긴축정책을 완화할 생각을 하지 않았고 정보통제를 한다 한들, 주변국의 TV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정세변화가 보도되던 상황이라 루마니아인들의 불만이 언제라도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되던 상황이었다. 이 당시에 차우셰스쿠 찬양집회를 위해 억지로 동원된 사람들도 집회가 끝나면 뒤로는 [[이디 아민]]이니 [[스탈린]]에 빗대 욕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정도였다. 차우셰스쿠 초기 당시에는 루마니아인들은 불가리아와 헝가리를 소련의 따가리 국가라면서 비웃거나 우월감을 뽐낼 때가 많았지만 긴축정책이 장기화되면서 이웃한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과 [[몰도바 SSR]]을 그래도 고기와 버터는 잘 먹는 풍요로운 공화국이라면서 부러워했고,[* 이 당시 소련의 1인당 육류소비량이 62~75kg 정도로 매일같이 고기를 먹을 정도는 되었다.] 독일계 주민들은 동서독과 [[오스트리아]], [[스위스]]를 비롯한 독일어권 국가들을 동경하면서 우리도 언제 [[동독]]처럼이라도 되었으면이라면서 부러워했고, 헝가리계 주민들은 헝가리 본토가 외채문제가 있다고 해도[* 헝가리 서기장 [[카다르 야노시]]는 집권 이후 '굴라쉬 사회주의'라 부르는 일련의 개혁정책의 자금을 루마니아, 폴란드 등 다른 동구권 국가들처럼 주로 서방의 외채에 의존했다. 그러던 중 두 번의 [[오일쇼크]]와 1980년대 초반의 세계적 경기침체(경기침체가 왜 일어났는지 궁금하다면 [[폴 볼커]] 문서 참고.)가 겹치자 1982년 90억 달러렸던 외채가 1989년 200억 달러까지 증가하기에 이른다. 헝가리 정부는 국가파산을 막기 위해 1982년 [[IMF]], 1983년 [[IBRD]]에 가입해 긴급자금지원을 받아 위기를 넘겼다.] 생필품 공급은 잘된다면서 헝가리 본토를 부러워했을 지경이었다. 1989년 12월 15일에 루마니아 서쪽의 도시 [[티미쇼아라]][* 역사적으로 [[트란실바니아]] 지역은 [[헝가리 왕국]]의 영토였던지라 [[헝가리인|헝가리계 사람들]]이 여전히 살고 있다.]에서 반차우셰스쿠 운동을 하던 [[헝가리]]계 [[개혁교회]] 목사 [[https://en.wikipedia.org/wiki/László_Tőkés|퇴케시 라슬로(Tőkés László, 1952~)]]가 강제 추방이 결정된 후 군에 의해 집에서 끌려나와 폭행을 당하자, 다음 날인 16일부터 티미쇼아라의 시민들이 이에 대한 항의 시위를 하면서 차우셰스쿠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시위가 격화되자 차우셰스쿠는 12월 17일에 티미쇼아라에 군 투입을 지시한 후 전국 지방당 최고간부들을 모아 긴급소집한 텔레비전 화상회의에서 '질서를 회복하라'며 직접 시위대에 대한 발포를 지시하며 [[세쿠리타테]]와 정규군을 동원해 반독재 시위대에게 실탄을 발포하게 했다. 심지어 당시 현장에 있던 [[헝가리]]와 [[유고슬라비아]]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루마니아 정규군이 시위대에 대한 발포를 거부하자 '''[[북한]]에서 파견된 [[용병]]들까지 동원해 시위대에게 총탄을 퍼부었다고 한다.''' 이 잔혹한 유혈진압이 자행된 단 하루 동안 2살짜리 아기와 69세의 노인을 포함한 최소 66명이 사망했고 300명 정도가 부상을 입었다. 거기에 엘레나는 티미쇼아라의 시위대 중 사망한 사람들을 비밀리에 화장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실제로 시위 진압 과정에서 사망한 43명과 병원에서 처형된 부상자들의 시신은 영안실에서 도난당해 강제로 부쿠레슈티로 운송된 후 화장되어 쓰레기통에 버려진 후 그 재는 운하 입구에 버려졌다. 그리고 12월 18일에는 티미쇼아라에 계엄령도 내려졌다.[* 쉽게 말해 차우셰스쿠는 바로 전날에 계엄령도 안 내려진 상태에서 반독재 시위대에게 군대를 투입한 것을 넘어서 '''불법 투입한 군대에게 발포를 지시하며 자국민 수백 명을 살상했다는 것이 된다!'''] 이에 대해 시위 진압 과정에서 1만 2천 명이 학살당해서 냉동고에 처박혀 있다는 등의 과장된 소문[* 심지어는 6만 4천 명이 시위 진압 과정에서 사망했다는 소문까지 돌았고, 이 수치는 루마니아 내에 역수출되어 차우셰스쿠의 재판에서 이 수치를 인용할 정도로 유명해졌다. 이 소문에 낚인 일부 서방 기자들이 티미쇼아라로 잠입했는데 아무리 티미쇼아라 시내를 뒤져도 수만 구의 시신을 찾을 수 없자 영안실과 티미쇼아라 극빈자 공동묘지를 습격해서 시체를 파낸 후에 학살당한 시신이라고 가짜 뉴스를 보낸 엽기적인 사건도 있었다.]이 서방 언론을 통해서 확산되었고 루마니아 국민들은 매우 동요하기 시작하였으며 민주화 시위가 루마니아 전역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국민을 감시하던 루마니아 정보부 또한 민심을 읽었지만, 이미 민심은 돌이킬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그의 종말이 머지 않았다는 생각에 일부러 차우셰스쿠에게 이런 상황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티미쇼아라에 계엄령이 내려지고 2인 이상 모임이 금지된 12월 18일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정국이 혼란한 와중에도 [[이란]]을 2박 3일의 일정으로 방문하면서 그해 갓 취임한 이란의 최고 종교지도자 [[알리 하메네이]]를 만나는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였다. 사실, 차우셰스쿠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는 모든 국민들을 감시하고 [[도청(범죄)|도청]]했으며 [[우상화]] 작업을 철저히 해왔다. 또 [[1984년]]에 일어난 [[쿠데타]] 역시 실패로 돌아갔으며 국민들의 소소한 저항은 항상 유혈진압으로 처리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6개월 전, [[천안문 6.4 항쟁|중국에서 학생 시위대를 탱크로 깔아뭉개고 [[중국공산당]] 정권이 승리한 것]]을 보고 차우셰스쿠는 크게 고무되어 있었다.[* 역으로 중국공산당은 차우셰스쿠가 끔살당하는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란 방문 직전에 열린 국무회의에서 차우셰스쿠는 시위대에게 본때를 보여줬어야 한다, 총 몇방 쏘면 다 달아나게 되어 있다고 내무부, 국방부, 비밀경찰을 상대로 폭언을 퍼부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1989년]] [[12월 21일]], 이란에서 돌아온 차우셰스쿠는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하고 평소처럼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 광장에서 10만 명의 국민들을 불러놓고 티미쇼아라의 시위를 규탄하는 연설과 지지대회를 벌였다. 이 과정이 차우셰스쿠 입장에선 정말 재수가 없었는데 원래대로라면 광장에는 차우셰스쿠에 대한 충성심이 높은 열성당원들이 모여서 차우셰스쿠의 연설을 화려하게 장식해야 했다.[* 참고로 이건 [[나치 독일]]의 [[요제프 괴벨스]]가 [[https://youtu.be/-Ew8rVQyND8|쓰던 유명한 수법이다.]]] 그런데 차우셰스쿠가 늦는 바람에 연설이 취소되었단 소문이 퍼지면서 모여있던 열성당원들은 거의 해산해버렸고 이에 허겁지겁 인근의 노동자들을 닥치는대로 징발해서 모아놨는데 난데없이 10년 가까이 쥐어짜대서 꼴보기 싫었던 독재자의 연설에 강제로 모인 사람들의 기분이 당연히 좋을 리 없었다. 그리고 차우셰스쿠는 언제나처럼 자화자찬식의 연설을 했지만, 연설 중간 광장에 모여 있던 국민들이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엄마도 사람이야 사람|"'''차우셰스쿠여! 우리도 사람이다'''"]], "학살자를 타도하자!", "[[루마니아인이여, 깨어나라!|루마니아는 잠에서 깨어났다!]]"라는 식으로 [[야유]]를 퍼붓고 티미쇼아라 시위의 무력진압에 항의를 하는 구호를 외치는 등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었다. 그리고 차우셰스쿠 독재정권의 몰락의 시초가 되는 이 역사적인 사건은 방송국을 통해서 루마니아 전역에 [[생방송]]으로 나가고 있었다. 이 당시 평일 낮에는 방송을 내보내진 않았지만 차우셰스쿠가 해외순방이나 연설이 있을 때 특별방송이라며 낮방송을 내보냈는데, 이렇게 우연의 우연이 겹쳐서 차우셰스쿠가 당황하는 모습이 전국에 생중계 된 것이다. [youtube(TcRWiz1PhKU)] 2분 40초부터 이러한 광경이 나온다. 차우셰스쿠는 자신의 연설에 군중이 야유와 비난을 퍼붓자 말을 잇지 못한 채 손을 흔들어 보이며 심히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고, 공산당 보안국 간부들이 "어서 관저로 들어오십쇼!"라고 재촉을 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자신의 [[사자후]]에 군중이 진정할 것이라고 착각했는지 "이보시오!(Alo!)"만 미친듯이 외쳐댔다. 옆에서 엘레나는 재촉하는 간부들과 야유하는 군중에게 "닥치시오!"라고 을러댔고 결국에는 부부가 같이 군중들에게 "동무들, 입 좀 다무시오!"라고 악을 써대는 상황이 되었다. 한참동안 목이 쉬도록 조용히 있으라고 소리질러도 군중이 잠잠해지지 않자 당황한 차우셰스쿠는 멍청하게 손이나 흔들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5분 30초 경에 보다못한 엘레나가 '뭐라고 말 좀 해 봐요!'라고 말한 것이 결정타였다. 결국 차우셰스쿠는 국가의 단합을 호소하는 내용으로 허겁지겁 연설을 마무리했지만 아무도 환호하지 않았고 옆에서 엘레나와 공산당 간부들만 열심히 박수를 쳐댔다. 한편 군중들의 성난 함성은 마침내 폭발했다. 차우셰스쿠는 예정된 것인지는 몰라도 연설 중에 [[1990년]] 1월부터 전국민의 [[월급]]을 2,000 레이에서 2,200 레이로, 노인 [[연금]]도 800 레이에서 900 레이로 올려주겠다고 했지만 그런 당근으로 국민들을 진정시키기는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텔레비전]] 연설 방송은 예정보다 일찍 종료되면서 바로 방송이 종료되었지만, [[라디오]] 방송은 계속 진행되어 당시 상황이 생생하게 알려졌고 방송이 나간 후의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사태가 심상치 않은 것을 눈치챈 부쿠레슈티 시민들은 궁전광장에 더욱 많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외곽에서 2번의 폭발음이 들린 후[* 이는 군중을 해산시키기 위해 터트린 폭죽 소리였다는 말도 있고, 총소리였다는 말도 있다.] 세쿠리타테가 시위대들에게 발포하기 시작했고,[* 후술하듯 루마니아군은 시위대에 대한 발포를 거부했다.] 분노한 시민들은 반차우셰스쿠 구호를 외치고 차우셰스쿠의 초상화를 찢었으며 차우셰스쿠를 찬양하는 책들을 불태워가며 더욱 열정적으로 시위에 나섰다. 이에 진압군들은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5.18 민주화운동]] 당시의 그것과 완전히 똑같은 수법을 쓴 무자비한 진압에 나섰다. 당시 진압군들은 시위대에게 자동화기를 동원한 무자비한 발포와 구타를 퍼부은 것은 기본이고 시위대를 총검으로 찔렀으며, 헬리콥터를 타고 다니며 군중들에게 [[로켓포]]를 난사하기도 했고, 심지어 호텔 인근에 있던 민간인들을 장갑차로 깔아뭉개기도 했다. 거기에 소방관들까지 물대포로 시위대를 공격했고, 부쿠레슈티 대학교 근처의 지하철역에서 하차한 모든 승객들은 임산부, 노인, 아이 가릴 것 없이 진압군들에게 구타를 당하고 땅에 끌려다녀 지하철역 계단이 피로 범벅이 될 정도였다고 한다. 1989년 12월 21일 오후 6시부터 시작된 부쿠레슈티의 반차우셰스쿠 시위 진압은 다음날 새벽 3시에야 끝났고, 이 짧은 기간 동안 무려 50명이 사망하고 462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1,245명이 구금되고 고문당했다. 거기에 사망한 시위대에 대한 부검도 금지되었고, 시신을 소각하라는 명령도 있었지만 이 명령은 이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위진압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루마니아의 정규 군대는 시위대에게 발포하지 않았고, 이에 차우셰스쿠는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국방장관]]인 바실레 밀리아(Vasile Milea, 1927~1989) 장군에게 군대를 동원하여 시위대에게 발포하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밀리아가 '''국방군은 인민을 지키기 위한 군대이며 인민에게 발포할 수 없다'''는 말을 남기며 이를 따르지 않자 차우셰스쿠는 밀리아에게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고 맹비난하면서 앞으로도 병사들에게 데모 군중들을 향한 발포 명령을 내리지 않는다면 싹 다 갈아치워 버릴 것이라고 협박했다. 그러나 바실레 장군은 앞에서는 차우셰스쿠의 말을 따르는 듯이 행동했으나 발포명령을 끝내 내리지 않았다. 차우셰스쿠는 이러한 참상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군대의 도움없이도 시위가 성공적으로 진압되었다고 생각하고 다음날 회의를 소집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차우셰스쿠의 희망대로 시위가 바로 잠잠해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날 밤 공단에서 일하던 노조원들이 부쿠레슈티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시위대를 지원하기 위해 자동차와 버스, 화물차 등을 타고 차우셰스쿠 하야를 위한 상경투쟁에 나섰던 것이었다. 또한 바실레는 1989년 12월 22일 아침에 의문의 총상을 입고 9시 30분 경에 시체로 발견되었고, 그날 라디오 속보를 통해 루마니아 전역에 발표되면서 상황은 시위대에 더욱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차우셰스쿠 정권은 그의 암살을 데모 군중들에 의한 암살이라고 선언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실을 믿지 않았고 다른 소식통들은 차우셰스쿠의 지시에 따른 암살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만약 정말로 차우셰스쿠의 말이 진실이어서 데모 군중에게 국방장관이 암살됐다고 가정한다면, 이미 시위는 엄청난 수준이며 진압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스스로 시인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다만 2005년에 바실레의 시신을 부검한 결과, 바실레는 자살한 것이 맞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이 사건을 계기로 [[루마니아군]] 내부의 분위기도 달라졌다.. "어? 우리 대통령이 우리 국방장관까지 죽이네? → 그럼 우리는 시위를 진압해도 살아남기 굉장히 힘들겠네? → 우리한테 주는 것도 없으면서 [[뒷통수]]를 쳐! → 당장 차우셰스쿠를 죽이자!"라는 입장이 되어버린 것, 당연히 루마니아군은 시위대 편이 되었다. 시위대의 편이었던 빅토르 스탄쿨레스쿠 장군은 가짜 [[깁스]]까지 하면서 차우셰스쿠와 연루되지 않으려고 했으나, 엘레나 차우셰스쿠에 의해 끝내 국방장관으로 임명당했고, 이렇게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서자 차우셰스쿠는 11시에 계엄령을 TV와 라디오를 통해 전격 선포했지만, 군대가 돌아선 이상 무쓸모한 조치였다. 그리하여 시위를 진압하러 보낸 정규군이 혁명 세력에 가담해 차우셰스쿠에게 되려 총부리를 겨눴고 수도 [[부쿠레슈티]]에서는 정규군과 [[세쿠리타테]] 사이의 [[시가전]]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런 시가전에도 시위대의 규모는 더욱 커졌고 부쿠레슈티 주민은 물론이고 지방노동자까지 합세하여 중앙광장과 그 근교에 수십 만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세쿠리타테를 압도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날 점심에 차우셰스쿠가 관저에서 탈출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시위대는 [[TVR]]과 정부청사를 장악했으며, 12시 50분에 오후 TV방송이 시작되었을때 문학가 미르체아 디네스쿠와 배우 이온 카라미트루가 "동지 여러분 우리가 승리했습니다!"라는 말을 하면서 차우셰스쿠가 도망쳤다는 소식이 루마니아 전국에 널리 알려졌다. 그 뒤에 루마니아 전역에서 노조원과 주부, 학생들까지 합세해서 차우셰스쿠 축출을 환영하는 시위가 열렸고, 각지에 공산당 지구당들과 보안대를 상대로 습격하는 사건이 잇따라 벌어졌다. 그리고 그간 TVR 텔레조날의 앵커를 맡았고, 그날 오전까지도 속보 및 계엄령 선포를 전한 게오르기 마리네스쿠 아나운서를 비롯한 여러 방송인들이 그간 거짓소식을 보내서 죄송하다며 사과방송을 내보낸 다음에 혁명을 지지하는 뉴스 및 속보를 내보냈고, 루마니아 [[공산당]]도 차우셰스쿠를 [[제명]]하며 그를 [[손절]]했으며, 3시에 이온 일리에스쿠가 임시 혁명정부 수립을 발표했고, 후에 임시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한편, 차우셰스쿠 정권 당시에 총리직을 지냈던 일리 베르데도 대통령직을 승계받을려고 했지만 시위대에게 막혔다.] 그리고 이들은 전력과 난방 공급 정상화 및 식량의 대대적인 배포를 약속했다. 이렇게 국민들 뿐 아니라 군대와 당에게까지 버림받은 차우셰스쿠와 그의 추종자들은 이제 도망치거나 저항하는 것밖에 남는 길이 없었다. 사실 이 상황에서 루마니아 정규군이 차우셰스쿠를 지지하지 않은 것은 무엇보다도 차별대우 때문이었다. 차우셰스쿠는 정규군을 신뢰하지 못했고 [[낙태]]와 [[콘돔]] 사용 등의 [[피임]]을 금지하면서 급증한 [[고아원]]에 넘쳐나는 [[고아]]들을 뽑아다가 자신에게만 충성하는 [[비밀경찰]]과 특별 보안군 '[[세쿠리타테]](Securitate, Departamentul Securității Statului)'를 조직하고는 그들에게만 특별 대우를 해주었다. [[별기군|게다가 친위대 역할을 맡은 보안군에게는 정규군에도 지급되지 않은 최신 장비와 더 많은 급여가 주어졌고]], [[임오군란|이에 정규군은 분노와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한편 티미쇼아라의 학살 하루 후인 1989년 12월 18일에 테옥티스트 아러파슈 루마니아 정교회 대주교는 "티미쇼아라에서의 반공주의 운동 탄압에 동의한다. 이 사건은 외국의 간섭으로 발생했다."고 회의에서 말했고, 바로 다음 날에도 차우셰스쿠에게 전보를 보내 그의 공산당 서기장 재선을 축하하고 그의 '훌륭한 활동', '현명한 지도', '대담한 생각'을 칭찬하면서 "루마니아인들이 (차우셰스쿠의) 이름을 올바르고 의롭게 지니는 황금 시대에 살고 있다"며 차우셰스쿠를 칭송하기도 했다.[* 사실 그는 이전에도 부쿠레슈티에 있는 7개의 유서깊은 교회를 철거하는 데에 동의했고, 차우셰스쿠에게 수많은 축하 전보와 '오래된'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나마 그가 세쿠리타테 정보원일 가능성은 낮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